“삼성과의 싸움에 씨앗을 뿌린 작은 거인”

이현국
2024-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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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5&artid=202406030600031


5월 19일 세상을 떠난 김성환 삼성일반노조 위원장

고 김성환 삼성일반노조 위원장이 2012년 12월 당시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아내 임경옥씨는 2011~2012년을 

삼성일반노조가 가장 바빴던 때로 기억한다. 이 시기 삼성일반노조는 

에버랜드 노조 설립을 돕고 삼성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과 연대했다. 

/임경옥씨 제공


지난 5월 2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는 검은색 모자를 쓰고 검은색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모였다. 모자에 새겨진 문구는 NSEU.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의 영문 약자다. 노조는 이날 회사의 성실 교섭을 요구하며 2000명의 조합원이 참석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참가자들은 저마다 ‘노동존중 실천하라!’, ‘노조탄압 중단하라!’고 쓰인 손팻말을 들었다. 틀림없는 노조의 쟁의행위지만, 노조는 이날 단체행동의 공식명칭을 ‘집회’, ‘시위’가 아닌 ‘문화행사’로 정했다. 실제 뉴진스님(개그맨 윤성호)과 가수 에일리·YB(윤도현밴드)가 행사에서 공연을 펼쳤다. 1000명 넘는 삼성 노동자가 서초사옥 앞에 모인 것은 삼성 창사 이래 이날이 처음이다.

삼성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 급성림프구성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황민웅씨의 아내 정애정씨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단신으로 끊임없이 서초사옥 앞에서 목청을 높였던 사람, 김성환 삼성일반노조 위원장이다. 그는 1996년부터 30년 가까이 삼성에 노조를 만들기 위해 싸웠다. 그리고 지난 5월 19일, 자신이 줄곧 서 있던 그 자리에서 삼성 노동자들이 대규모 집회를 여는 광경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향년 65세.

삼성 반도체 직업병 사망자 유족으로, 삼성 노조 설립 뜻을 함께하는 동지로 김성환 위원장과 2015년 88일 농성을 함께한 정애정씨는 이렇게 말했다. “ (김 위원장은) ‘삼성에 노동조합의 꽃을 피우리라, 노동자들이 일어서는 걸 보리라’ 그것에만 오롯이 몰입하면서 쓰러지기 전까지 투쟁했다. 전국삼성노조가 집회하는 건 결국 못 보고 가셨지만, 저는 그분이 씨앗을 뿌렸다고 생각한다. 반도체 직업병 싸움을 할 때도 처음에는 집회를 할 엄두조차 못 냈다. 회사에서 유령집회 신고(실제 집회는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집회를 막기 위해 장소를 선점하는 집회 신고)를 낼 때라, 집회신고를 못한 날은 스피커도 못 쓰고 맨 목소리를 내면서 1인 시위를 해야 했다. ‘삼성 앞에서 어떻게 하나’ 겁이 나고 무서워서 처음엔 못 했다. 그런데 김 위원장이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삼성도 다른 기업처럼 싸울 수 있는 기업이다’, 그런 용기를 줬다고 생각한다. 저는 그분이 충분히 심어놓은 씨앗이 지금 싹을 틔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김성환 위원장은 무노조 시대 삼성의 노동운동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삼성에 노조를 설립하려는 시도는 많았지만, 그 같은 사람은 드물었다. 꺾이지도 않았고, 포섭되지도 않았으며, 싸움의 결과에 연연하지도 않았다. 끊임없이 싸웠다. 작은 싸움, 가망이 없어 보이고 장기화할 게 뻔한 현장에 주로 자리했다. 그래서 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가치 있다. 개인사의 굽이굽이마다 노동자들에게는 거대한 벽이었던 삼성의 그늘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


그는 삼성의 무노조 경영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드러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특히 무노조 경영을 지키기 위해 삼성이 어떤 일들을 해왔는지 알리고 기록했다. 그중에는 노동자들의 납치·감금·미행 등이 2000년대에도 벌어졌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있었다. 김 위원장의 아내 임경옥씨(63)조차 한동안은 이 이야기들을 곧이듣지 않았다. 지난 5월 27일 인천에서 만난 임씨는 “그런 얘기를 하면 저도 잘 안 믿었다. 삼성이 얼마나 사회악인지 쉽게 설명하려고 저런 얘기도 하나 보다 했다. 실제 있었던 일이라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라고 했다.

삼성SDI 울산공장에서 일하던 A씨는 2001년 12월 출근 후 가족과 연락이 

끊겼다. A씨의 딸은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 “저희 아버지께서 납치당하셨어요”

라는 글과 함께 문자메시지를 촬영한 사진을 올렸다. 

/<벼랑 끝에서 희망을 움켜쥐고> 갈무리


삼성은 창업주의 무노조 유지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불법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2001년 12월 울산의 한 학생이 인터넷 커뮤니티 곳곳에 “저희 아버지께서 납치당하셨어요”라는 글을 올렸다. 삼성SDI에서 일하는 아버지 A씨가 “아빠 납치된다. 경찰에 신고해라”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A씨는 당시 회사의 일방적인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내용의 유인물을 배포했다가, 회사 관리자들에게 2박3일을 끌려다녔다. 관리자들은 유인물 작성 사실을 시인하고, 앞으로 노사 문제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하라고 종용했다. 중간에 탈출을 하다 낭떠러지로 떨어져 두 발목과 허리를 다치고 다시 붙잡혔다. 그는 서약서에 서명하고 사흘 만에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런 일이 처음도 아니었다. 1999년 12월에는 노조를 만들려던 삼성SDI 수원공장 노동자들이 면담이라는 명목으로 며칠간 관리자들에게 끌려다녔다. 관리자들은 이들에게 사직서를 쓸 것을 종용했고, 그 대가로 수천만원씩을 건네기도 했다. 애초 김성환 위원장이 삼성과 싸움을 시작하게 된 과정도 이와 유사했다. 김 위원장은 1993년 이천전기에 입사해 노조를 만들려다가, 1996년 삼성전자가 이천전기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해고됐다. 당시 징계사유는 불법단체 구성, 불법 홍보물 배포 등이었다. 2000년 2월 삼성해고자 복직투쟁위원회가 출범하고 의장이 된 김 위원장은 당시 삼성의 각 계열사에서 일방적으로 추진되던 구조조정 저지 투쟁과 함께 삼성의 노동 탄압을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사건들은 몇몇 언론에서만 다뤘을 뿐 사회적인 의제가 되지 못했다.

그 무렵 김 위원장은 자신이 감시당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노동자를 만나러 지방에 가면 회사 관리자들이 한발 먼저 그가 지방에 온 사실을 알았다. 김 위원장을 만난 노동자들은 다음날 회사에서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추궁당해야 했다. 2004년 6월 의심은 확신이 됐다. 김 위원장은 약 1년 전부터 자신도 모르게 ‘휴대전화 친구찾기’라는 서비스에 가입돼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두 사람 이상이 상호 동의하면 위치추적이 가능한 서비스였는데 김 위원장은 동의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친구로 등록된 휴대전화의 명의자는 이미 사망한 사람이었다. 누군가 피해자들의 휴대전화를 불법 복제해 친구찾기 서비스에 가입한 것이다. 당시 노동자 12명은 위치추적이 이뤄진 사실을 확인하고 삼성 경영진 등을 검찰에 고소했다. 검찰은 6개월 만인 2005년 2월 휴대전화 불법 복제는 있었지만, 누가 했는지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며 기소중지 처분했다.

이 사건은 김용철 변호사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에서도 언급된다. 삼성그룹 법무팀장으로 일했던 김 변호사는 2007년 삼성의 불법 경영 승계, 비자금 조성 의혹 등을 폭로했다. 그는 책에서 “B씨(삼성 구조조정본부 인사팀장)에게 ‘정말로 위치 추적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B씨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시인했다”고 했다. 김 위원장은 2008년과 2009년에도 이 사건에 대한 새로운 증거를 확보해 다시 고소했지만 검찰은 재수사에 나서지 않았다. 그는 2005년 ‘매일노동뉴스’와 인터뷰에서 이 사건이 삼성을 신비화하는 데 이용돼선 안 된다며 “삼성의 정보력이 대단하다, 무시무시한 곳이라는 말로 삼성 무노조 신화를 깨지 못하는 것을 합리화하고 있다. 우리가 힘이 없어서 삼성에 지는 게 아니라 단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는 것”이라고 했다.

2005년 2월 검찰이 불법 위치추적 사건을 기소중지한 지 6일 만에 김 위원장은 삼성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법정 구속됐다. 납치 등 삼성의 노동 탄압 사례를 모아 2002년 백서 <벼랑 끝에서 희망을 움켜쥐고>를 펴낸 것이 문제가 됐다. 그로서는 초법적인 탄압에도 사회 의제가 되지 못하니 이 문제를 알리고 싶은 마음이 컸을 것이다. 이 책의 말미에 김 위원장은 “많은 분께 삼성재벌의 노동자 탄압의 실상을 알리고 삼성 노동자, 삼성 해고자들의 투쟁사로 널리 읽히길 간절히 바란다”고 썼다.

검찰은 ‘7가지 허위사실’로 삼성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김 위원장을 기소했는데, 2심 재판과정에서 공소사실 대부분을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바꾼다. 이 경우 적시된 사실이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이라면 명예훼손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파기환송심까지 지난한 법정 공방이 이어졌지만, 법원은 일관되게 김 위원장에게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이라 볼 수 없고 피해자를 비방할 목적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당시 이 사건에 관해 쓴 글에서 “한 개인이 자신의 모든 역량과 정보를 동원하여 거대기업의 비리를 적발해 내고 이를 시민사회와 더불어 사회적 의제로 부각시키고자 하는 노력 그 자체가 명예훼손이라는 편협한 법리의 조작에 의해 처절하게 무화되고 있다”고 했다.

당시 김 위원장은 2003년 업무방해죄로 받은 징역 3년형의 집행이 4년간 유예된 상태였다. 명예훼손 사건으로 징역 5개월 선고를 받으면서 앞서 유예된 3년형까지 집행이 이뤄졌다. 국제앰네스티는 2007년 삼성을 상대로 노동기본권을 획득하려 10여 년 동안 투쟁한 김 위원장이 양심수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한국 노동자 중 국제앰네스티의 양심수가 된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김 위원장은 감옥에 있는 동안 부모님 두 분이 모두 돌아가시면서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고 노회찬 의원 등이 청와대 앞 1인 시위로 그의 사면을 촉구했다. 그는 노무현 정부 임기 말이었던 2007년 연말 사면됐다. 34개월을 복역한 뒤였다.


제일 힘든 곳을 찾던 작은 거인

고 김성환 삼성 일반노조 위원장의 아내 임경옥씨를 지난 5월 27일 

인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임씨는 현장 노동자들을 만나기 위해 

전국을 돌던 김성환 위원장을 대신해 가족을 건사했다. 

그는 김 위원장에 대해 “한결같았다. 앞뒤의 모습이 다르지 않았다. 

처음 만났던 모습 그대로의 사람으로 갔다”고 했다. 권도현 기자



그가 노동운동에 매진하는 동안 세 자녀를 건사한 건 아내 임경옥씨였다. 임씨는 1980년 대학교에 다니다 말고 봉제공장에 시다(보조원)로 위장 취업했다. 이듬해 밀링기술자로 일하던 김 위원장을 만났다. 김 위원장에게 임씨는 아내이면서 가장 신뢰하는 동료였다. 그는 “믿을 사람은 마누라밖에 없다”며 언제나 자신이 하는 일들을 임씨에게 설명했다. 임씨는 “43년을 같이했는데 미운 게 얼마나 많았겠나. 김성환씨로 인해 경제적인 부분뿐 아니라 정서적인 부분도 고통받은 게 많다. 그런데 김성환 인생이 모든 것을 상쇄할 만했다. 너무 뜨겁고, 진실됐다. 사람을 상대할 때도 그렇고, 삼성과 싸울 때도 정직하게 했다. 타협하지 않았다”고 했다.

임씨는 녹즙·우유 배달, 24시간 김밥집 야간 아르바이트, 화장품 가게, 정수기 판매, 세차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그 와중에도 김 위원장의 싸움을 거들었다. 인상 깊었던 싸움도 많다. 김 위원장은 이천전기에 입사하기 전 한독금속에서 일하며 1987년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이후 한독금속은 돌연 폐업하는데, 노동자들은 한동안 공장 부지를 지키며 작업 재개를 요구했다. 영화 <파업전야>가 여기서 촬영됐고, 일부 노동자들은 엑스트라 등으로 영화 제작을 도왔다. 임씨는 둘째를 임신한 상태에서 첫째 아이를 업고 매일 현장을 찾았는데 힘든 줄도 몰랐다고 했다.

임씨가 인상 깊게 기억하는 또 다른 장면은 2006년 5월 김 위원장의 옥중 단식이다. 김 위원장은 삼성의 정치권·검찰 로비 의혹이 담긴 ‘삼성 X파일 사건’이 터지자 수사를 촉구하는 단식을 하는 등 옥중에서 9차례 단식을 했다. 2006년 5월에는 영등포교도소 재소자 방에 창문을 내주고, 주말에도 운동시간을 보장해 달라는 단식을 했다. 교도소는 방마다 창문을 내는 공사를 시작했다. 임씨는 “자기가 처한 상황이나 다른 사람들이 처한 부당한 상황을 눈감고 넘어갈 수도 있는데 김성환씨는 그때그때 문제를 지적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황언식씨는 2007년 삼성SDI 울산공장 사내하청업체에서 해고됐다. 삼성SDI의 정규직이었지만 삼성이 황씨가 맡은 공정을 사내하청업체에 넘기면서 비정규직이 됐고, 몇 년 뒤 결국 계약이 해지됐다. 황씨는 2008년 말까지 회사 앞에서 농성했는데, 김 위원장은 이때도 함께했다. 그는 “김 위원장은 삼성 본관 앞에서 싸우셨던 작은 거인이었다. 삼성과 싸움에서 독보적인 분이었다. 회사에서 불이익을 받아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문제 제기를 해야 하는지 모르는데, 가장 먼저 찾고 알릴 만한 분이었다”고 했다. 1년여간 농성을 이어갔지만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기사는 한 줄도 나오지 않았고, 농성이 길어지면서 노동자들도 하나둘 떠났다. 황씨는 “김 위원장은 항상 제일 약한 곳, 제일 힘든 곳을 먼저 찾아갔다. 잘되는 데는 굳이 가서 뭐 하느냐고도 했다. 삼성과 싸우다가 타협하는 사람이 많았다. 김 위원장이 물질적인 걸 탐했으면 벌써 바꿔 탔을 것이다. 다른 마음 먹은 바 없이 평생을 바쳤는데 어떤 것도 시원한 결말을 못 보고 가신 게 가장 안타깝다”고 했다.

지금은 노동3권 보장하고 있을까

그의 장례는 가족과 평소 연을 맺었던 이들이 모인 가운데 조용히 치러졌다. 일생을 투신했지만 노동자장이나 노동조합장으로 치러지지 않았다. 그의 싸움 대부분은 사람들이 관심을 두는 대중적인 싸움이 아니었고, 노동운동계에서도 비주류였다. 늘 날이 서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김 위원장은 황언식씨의 싸움이 끝난 직후인 2009년 ‘프레시안’ 기고문에서 “삼성에 순응하며 하루하루 사는 일을 벗어나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주장하는 그 순간부터 당해야 하는 일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모든 인간관계는 단절되고 철저히 외로움의 날들이 시작된다. (중략) 노동운동을 한답시고 자신의 이권을 챙기려는 사람들도 있다는 잔혹한 현실을 배워야 하고, 내 눈으로 보고도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되는 세상이라는 것도 배우게 된다”고 했다.

삼성과 고된 싸움도 날이 갈수록 그를 뾰족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정애정씨는 “(김 위원장은) 타협을 시도하면 회사가 빈틈을 파고들어서 갈라지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를 양보하면 둘을 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도 삼성과 싸움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송경동 시인도 “노조를 만들고 교섭을 하자는 사회적으로 인정되고 통용되는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었는데 어떻게 타협할 수 있었겠느냐. 그가 유별났던 것이 아니라 삼성이라는 재벌집단의 반노동의 벽이 컸던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2020년 5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이제 더 이상 삼성에서는 ‘무노조 경영’이란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며 “노사관계 법령을 철저히 준수하고, 노동 3권을 확실히 보장하겠다”고 했다.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와해 혐의로 삼성 임직원 26명의 유죄가 인정된 직후였다. 지금 삼성은 노동 3권을 충분히 보장하고 있을까. 전국삼성전자노조는 올해 회사와 임금 교섭을 벌였지만 입장차를 좁히지 못했다. 입장차가 계속되는 중에 삼성전자는 노조를 제쳐두고 기존의 노사협의회와 임금을 조정하고 이를 발표해버렸다. 무노조 경영 시대에 노동자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데 활용하던 노사협의회를 여전히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전국삼성전자노조는 오는 6월 7일 파업을 선언했다.

2004년 신세계 이마트 노동조합 설립 때부터 김성환 위원장과 연을 맺은 이종란 반올림 노무사는 “삼성에 저항해 노동운동을 했던 선배들과 노동자들의 헌신적인 싸움 위에서 노조가 만들어지고 쟁의행위를 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앞길을 뚫어온 것이다. 그럼에도 삼성이 노조를 인정하는 척하지만, 정당한 협상 파트너로 보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여전히 같은 얘기를 반복하면서 집회를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갈 길이 멀다”고 했다.

<이효상 기자 h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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